연애로 운동하기(2012)

조회 수 3568 추천 수 0 2012.07.13 10:29:51

내 마음먹은 대로만 세상이 굴러간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냐만 그렇지 않았다. 더욱이 연애에 있어서 내 마음대로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랑에 빠지는 순서도 순간도 내가 원하는 대로 계획할 수 없었고, 연애가 흘러가는 방향도 내 마음대로 잡을 수 없었고 그 연애가 끝나는 순간도 내가 계획할 수는 없었다. 연애에 휘둘리다보니 세상사는 것도 참 정신없었다.

정치적으로 딱히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몸이 맞기도 하고 몸이 맞으면 마음이 동하기도 하다 보니 섹스가 지겨워지면 관계가 끝나는 게 당연했다. “마초와 사귀어주지 않는 것도 운동의 일환이다”라는 어느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지만 어찌 그게 쉽게 되질 않았다. 남들은 욕하면서 본다는 영화 ‘연애의 목적’을 보며 감정이입 제대로 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저 남자가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사랑하게 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허우적대며 내 감정을 조절할 수 없었던 그 순간을 그린 영화라고 내 식으로 해석하며 폭풍 눈물을 흘렸다. ‘세상에 마초가 아닌 남자가 있긴 하냐고! 남자한테 섹스만 기대하면 되는 거지, 뭘 더 바래!’ 이렇게 쿨 한 태도로 연애를 낙관했다면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떻게 연애에서 섹스만 하겠나. 게다가 이놈의 남자들은 어찌나 말이 많은지, 섹스 중간 중간에도 반여성주의적 언어들을 내뱉기 일쑤였다. 아주 성욕이 감퇴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별 수 없었다. 말이 적고 덜 배운 남자를 골라서 잘 가르치는 방법을 택하는 수밖에. 인문계열은 너무 주워들은 게 많아서 안 되고, 그래 공대 쪽이 좋겠다. 그 길이 평탄하지 않을 거라 그 때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새싹부터 잘 키우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고만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 사랑의 힘은 위대하니까. 잘 가꿔보자. 

옳은 소리는 바라지 않고 적어도 헛소리는 안하는 남자를 만들어보자.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에게서 심각한 결함을 발견했다. 뼛속부터 마초일 지도 모른다는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킨 바로 그 사건. 아 그 때 버렸어야하는 건데 말이지. 평소와 다름없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가 “여자랑 복어는 맞아야 한다잖아”라는 말을 웃으며 꺼냈다. 그 때 욕이라도 한바가지 해주고 나왔다면 좋았겠지만 내가 워낙 자비로우신 지라, 그 상황에서 고조 곤히 앉아 없는 깜냥으로 여성학 강의를 시작했다. 그 때부터 그 연애는 망할 징조가 역력했다. 안될 놈을 붙잡고 그런 짓까지 했다니 아 나는 노벨 평화상 후보에라도 올라야 되는 거 아닌가.


농담인데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냐고 나를 탓하는 남자를 부여잡고 ‘예능, 다큐로 받기’의 진수를 보여드렸다. 안 돼. 넌 내 연애로 운동하기 첫 마루타란 말이야. 나랑 헤어져서 다른 여자를 만나더라도 어디 가서 욕먹지 않을 만큼 내가 만들어 줄 거야. 물론 그에 대한 애정도 있었다. 애정이 없었다면,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 자비로움이 어디서 나왔겠나. ‘사랑의 힘’은 위대하니까. 가능성을 믿고 버텨보자고!

연애로 운동하기가 가능할 거라 철썩 같이 믿었던 나는 그에게 여성주의적 마인드를 심어줄 만한 이야기도 조심조심 그러나 끈질기게 하기 시작했다. 만나서도 못 다한 말은 긴 메일에 담아 보냈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야기부터 퀴어 관련이슈, 장애여성, 여성주의 이야기까지 여성주의 학교 뉴스레터 돋는 메일을 손수적어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답장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렇게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그는 나의 여성주의 활동을 지지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좋은 일’하는 거니까 라며 언니네트워크 후원도 시작했다. 나는 그가 점점 좋아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때 의심을 했어야 했는데 대체 뭘 바라고 난 그 험난한 길을 걷고 있었던 걸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주옥같은 수업 자료들이었다. 난 한마디도 버리지 않고 고이 담아 술자리에서도 밥 먹는 자리에서도 깨알 같은 여성학강의 판을 벌였다.
 
내가 어쩌다 이 세상에 ‘이성애자’로 태어나서 어쩔 수 없이 너 같은 ‘남자’를 만나고 있으니, 우리 좀 잘해보자고 그를 어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폭발했다. “잘난 척 좀 하지 마! 네가 알면 뭘 그렇게 잘 알아? 내가 너보다 오래 살았어! 너 나한테 한 번도 오빠라고 안 부르더라? 앞으로 오빠라고 불러!” 도끼눈을 뜨고 소리치던 그의 얼굴은 그저 전형적인 ‘남자’였다. 아, 남자 가르쳐봤자 소용없구나. 난 이제까지 뭘 한 걸까. 그리고 얼마 후 난 그와 헤어졌다.


얼마 전 지인에게 질문을 받았다. 정치적 견해가 완전히 ‘틀린’ 남자를 만나는 페미니스트의 심리는 뭔지 궁금하단다. 그런데 이거 듣고 보니 내 얘기다. 정치적 견해가 ‘틀리다’에 가까운 남자를 만나며 사랑으로 보듬고 어루만져가며 연애를 끌어오던 나의 이야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너무 자비로웠다. 굳이 그렇게 연애를 끌고 올 필요는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만나야한다는 강박이 나를 옭아맨 것에 틀림없었다. 나의 여성주의자 정체성은 그렇게 쉽게 분리될 수 있는 지점이 절대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전부이자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또 마초 감성에 이미 찌들대로 찌든 남자를 바꾸는 데에는 그야말로 ‘헌신적인’ 시간과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 노력을 굳이 되도 않는 연애에 쏟아 붇느니 ‘안 만나주는 것’으로 운동하는 편이 훨씬 더 효과적일 듯싶다. 연애로 운동하기란 내게 어떠한 해방감도 가져다주지 않았고 나의 성장을 더디게 만들 뿐이었다. 어쩌면 나의 '방법‘이 잘못됐을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방법까지 고민하면서 연애를 해야 되나 싶다. 관계를 내가 원할 때 싹둑 자를 줄 아는 것도 ’잘난년‘의 기본요소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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