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히 걸어가다가 넘어졌다.
그 전에 넘어졌던 상처가 겨우 아물어가던 시점이었다.
그녀는 웃으며 다시 걸었지만 걸음걸이는 엉망이었고 눈물이 찔끔찔끔났다.
그때와 똑같은 계단에서였다. 그것도 같은 수요일에.
달라진 게 있다면 그가 곁에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사실에 더욱 슬퍼졌다.
찔끔거리는 시간은 길어졌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녀는 사랑에 빠지기 아주 좋은 타입이었고 그만큼 푹 빠졌다.
그와 처음으로 섹스를 한 날 그녀는 평생 그에게만 안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몸을 아주 조심히 어루만졌고 그녀의 몸에 조심스럽게 사정했다.
그녀는 그 일이 언젠가 끝을 보리라곤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가 그녀의 동공에 비춰있었고 그의 얼굴이 너무 행복해보였다.
그녀의 얼굴도 그만큼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녀에게 줄 정액의 양이 한정 되 있단 걸 누가 알았을까?
그는 할당된 양의 정액을 뿜어놓고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사실 그리 담담하지 못했다. 기분전환 겸 빌려온 그 드류베리모어가 놈팽이 같은 놈한테 넘어가는, 아, 뭐라더라, 웨딩싱어. 그 로맨틱 코메디는 그녀의 몰골을 그야말로 코메디 처럼 만들었다.
그녀는 힘들었다. 저녁에 자기 전 들어야했던 그의 목소리가 없었고, 그의 달콤함이 없었다.
그가 떠나가기 전날에도 그는 달콤함을 선사했다. 그녀는 그의 친구로 되돌아 갈 수 없었다.
그와는 항상 연인이었기에.
그와 그녀는 만날 그 날부터 서로의 몸을 탐닉했다. 그는 노래하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댔고 별 양해도 구하지 않은 체,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그가 맘에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응했다.
서로의 몸을 보았고 둘은 열심히 섹스에 몰두했다. 그의 섹스매너에 그녀는 반해버렸고 그 다음 그의 목소리에, 그 다음 그의 쿨 함에 반해버렸다.
사실 순서의 중요함을 그녀는 몰랐다. 순서가 뒤바뀌면 정열의 순서마저 뒤바뀐다는 걸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도도함에 점점 싫증을 냈고 그녀의 사랑에 보답할 만한 연기를 선보이는 것 또한 힘겨웠다. 귀엽게만 보이던 그녀의 어리광도 맨 정신으로 들어줄 수 없을 만큼 역겨워졌을 때, 그는 그녀에게 헤어짐을 요구했다.
그녀는 담담하게 -그래- 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의 핑계도 들어야만 했고 그에게 한번쯤은 매달리고 싶었다. 그는 헤어짐에 대해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는 헤어지기 위해 먼저 그녀의 입술을 거부했다.
그는 그녀와 담담하게 헤어지곤 연락조차 없었다. 그는 울먹이는 그녀의 전화를 매몰차게 끊어버렸다. 그는 그녀가 귀찮았다. 이 정도로 매달릴 거라곤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와 헤어지고 싶은 것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는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지기만을 생각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싫었다.
그는 불을 끄고 아주 편안히 잠들었다. 그녀와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힘들어하는 건 그녀뿐이다. 그녀는 죽을 만큼 괴로워했고 슬퍼했다.
크리넥스는 벌써 두통 째 거의 다 써버렸지만 눈물의 농도는 점점 더 짙어져만 갔다.
그녀는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를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그가 귀엽다고 칭찬해주던 머리카락이 거울에 비치는걸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옷장을 열면 그 날 입었던 옷이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100일 기념으로 그에게 받았던 장미는 누렇게 변색되어갔다.
그녀는 그와 함께였던 순간들을 생각했다. 그녀는 그때 그에게 사랑 받고 있다고 확신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행복했다. 그 때는 꿈꾸는 듯한 기분에 항상 젖어있었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져서 그녀의 모든 시간을 괴롭혔다.
그녀는 그와 헤어지기 전 4일 동안 연속 같은 꿈을 꿨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엔 너무 어렸다. 그녀는 그에게 같은 꿈을 연속해서 꾸고 있다고만 말했을 뿐이다.
그가 예의 상 -무슨꿈인데?- 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나중에 더 궁금해하면 말해줄 작정으로 대답하지 않았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 깊이 잠겼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더 이상 돈을 쓸 만큼 경제적 여유가 있지 않았다. 그녀는 파렴치 할 만큼 그가 내는 것을 당연히 여겼고 그는 그녀에게 더 이상 돈 쓸 가치를 못 느꼈을 때 헤어졌다.
솔직히 섹스를 하는 건 둘인데 모텔 비는 한쪽만 부담한 다는 건 상당히 거북한 일이었다.
그녀는 주기적으로 힘들어했다. 특히 밤에 전화할 마땅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그의 빈자리를 더욱 상기시켜 주었다. 몇 일은 괜찮았지만 또 몇 일은, 힘들었다.
그것은 그리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생리주기처럼 일정하게 돌아왔다.
그녀는 죽을 만큼 괴로웠다. 그도 슬퍼하고 있을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또 다른 상대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잊은지 오래였다. 그녀의 전화번호는 이미 삭제되었다.
뭐, 그녀 또한 그를 잊기 위해 전화번호를 삭제한 건 마찬가지였으나 기억에서 삭제라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자신의 약한 모습에 스스로 놀랐다. 힘들어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 자신을 멍들게 했다. 이제 그와 잡아 놓은 섹스 스케쥴과 생리 날짜가 겹칠 까봐 조바심 내지 않아도 된다.
그에게 빌려주기로 약속만 했던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 소설은 빛을 잃어갔다.
그녀는 그와 공유할 책이 단, 한권도 없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는 그녀의 항상 똑같은 순서의 섹스에 실렸다. 처음에는 신선했지만 그녀의 저질스러운 문장 나열에 넌더리가 나기 시작했고 그녀의 굵은 허벅지가 더욱 선명해졌다. 귀엽기만 하던 그녀의 작은 가슴이 눈에 거슬렸다.
그녀에게 해왔던 짓궂은 농담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그녀와 헤어졌다.
그는 마지막까지 완벽히 연기했다. 조금은 슬픈 듯이 하지만 단호하게!!
그는 자신의 연기력에 감탄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엔 그가 자신을 농락했을 지도 모른단 생각이 문뜩 떠올랐으나 그 때 그녀는, 자신을 탓했다.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더 이상 만나면 힘들어 진다는 말의 속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를 돈으로라도 사고 싶었다. 그의 얼굴을 볼 수 있고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녁에 라디오에서 나오던 노래는 그녀의 이야기를 울게 만들었다. 그의 장난일 것 만 같아 항상 손에 핸드폰을 들고 다니며 메시지와 전화목록을 꼼꼼히 체크했다. 뻔한 결과 일 테지만.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세상의 반이 남자라며 그녀를 위로하려 들었지만 그 사실은 그녀는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반이나 되는 남자 중에 그와 같은 남자는 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의 반이나 되는 여자 중 한 명을 잽싸게 낚아챘다. 그리고 여자의 성격을 파악한 다음 조심조심 다가갔다. 여자는 그녀와 달랐다. 마른 몸에 두툼하고 요염한 입술은 그를 환상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단숨에 여자에게 빠져들었다. 그리고 여자를 갖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였다. 여자를 잃을 까봐 늘 조마조마 했지만 곧 자신에게 매달리던 그녀를 떠올리며 자신감을 얻었다.
그녀는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없었다. 그 대신 첫사랑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하였다.
그녀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 맞췄고 그녀의 톤이 매우 슬프다는 것도 느꼈다.
하지만 그녀와 언제 또 연락할지 알 수 없었고 말해야만 했다.
첫사랑은 다음주에 결혼을 한다고 말했다. 시간이 되면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그녀는 첫사랑에게까지 버림받은 자신이 너무 싫었다.
그녀는 아주 이기적이었다. 그녀가 첫사랑과의 헤어짐을 자초했음에도 영원히 사랑한다던 그 말이 유효하길 바랬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의 앞에는 너 혹은 내 맘이 변질되지 않는 한, 이란 조건이 붙어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는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배가 더부룩하고 가슴이 텁텁했다.
신물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그녀는 구역질이 났다.
하루에 한끼도 먹기 괴로웠다.
차라리 배고픔을 참는 것이 행복했다.
그녀는 연 삼일을 생으로 굶다가 배를 진정시키기 위해 뜨거운 물을 끓였다.
그녀는 정신 없이 물을 따라 마셨고 그 바람에 입천장이 벗겨졌다.
칫솔에 치약을 짜서 이를 문대는 동안 벗겨진 입천장이 닿아버렸고 그녀는 고통스러웠다.
그보다 더 멋진 남자가 있을 거라며 위로했지만 금방 그의 생각으로 마음이 물렁해졌다.
나중에는 자신이 왜 슬프게 울고 있는 지조차 잊은 체로 그녀는 울어댔다.
그냥 슬펐다. 그녀는 슬펐다.
헤어진지 정확히 2주가 지났을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의 번호가 바뀌었다는 정보를 들었다. 자신이 그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고 다른 사람은 아주 당황해했다.
그녀는 생각보다 빨리 그를 잊을 수가 없었다.
네달 정도를 사랑했을 뿐인데 그것을 잊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그녀는 다른 맘에 드는 남자 생겼지만 그를 잊을 수 없다는 죄책감에 그 남자에게 자신의 호감도를 표현 할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한 마음이 집착일 수도 있겠으나 확실한 건 그녀가 그를 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해왔다.
그는 또 다른 여자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한다.
그녀는 힘들다.
그녀는 너무나 힘들다.
그에게 사랑받았었다.
그는 그녀의 말에 꼼짝못했다. 헤어지기 전엔.
하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를 애타도록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