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불안했다.
불안함을 가라앉히기 위해 물을 끓인다. 주전자에 물을 꾹꾹 담아 넣는 동안 불안감까지 그녀의 머릿속에 지독하게 가라앉는다. 그녀는 그랬다. 언제나. 젠장할.
그녀는 그 남자를 욕한다. 어젯밤. 나의 몸을 소유했던 그 남자.
그녀는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한다.
피임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채 그 남자를 욕한다. 망할놈.
불과 2년 전이다. 그녀는 키스도중 그의 그곳을 만지작거린다. 그의 손이 "만져도 되?" 라는 문장과 동시에 그녀의 가슴으로 올라온 것에 대한 일종의 복수였다고 그녀는 자신을 합리화시켰지만 사실 그 기억은 왜곡된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아주 친절하게 가슴위로 가져다 주었다. 그녀의 손이 그곳을 만지작거린 건 그 다음. 그리고 그의 손이 마침내 그녀의 그곳으로 왔을 때 그의 귀에 그녀는 속삭였다.
생.리.중.이.야.
처음으로 그와 섹스를 한날. 그의 정액이 그녀의 몸에 스밀 때쯤. 그녀는 깨닫는다.
그녀가 피임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사실 그녀는 그것의 중요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임신의 위험성을 깨우친 건 그였다.
오늘 괜찮은거야?
그녀는 그와 함께 산부인과에 간다.
하지만 응급피임약 처방전을 받아들었을 때에도 그녀의 머릿속은 임신에 대한 불안감보다 약값에 대한 불안감이다.
다행히도 약국에 들어간 건 그였다. 그녀는 안심했다.
멀찍이 떨어진 두 개의 알약 중하나를 입에 문다.
그녀와 함께 그녀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그녀는 그에게 싱긋 웃으며 말한다.
안녕. 그게 끝이었다.
당황하는 그를 그대로 두고 그녀는 발랄하게 뛰어간다.
그녀의 엄청난 이기심이 그를 짖누른다.
그녀는 집에 간다.주전자에 물을 붓기 시작한다.
라면을 봉지채 쪼갠뒤 봉지를 찢는다. 그녀의 다리가 간지럽다.
두번째 손가락으로 종아리를 긁는다.
오랜만이잖아? 라면스프의 마지막까지 탈탈 털어낸다.
그리고 냄비뚜껑을 잠시 덮었다가 연다.
이렇게 살짝만 익은게 맛있단말야. 식탁으로 옮긴다.
젓가락으로 재빨리 면을 움켜쥔다.
먹으면서 생각한다.
요즘 살이 찐거 같단말야. 브래지어 후크가 한칸 늘어났다구.
가슴이 커진건가?
약간 남은 라면국물을 싱크대에 버리고 그릇을 씻는다.
사실 부주의한건 그녀 자신이다.
콘돔의 부자연스러움을 저주한것도 그녀 자신이다.
하지만 동시에 정액냄새까지도 저주한다.
그녀의 입에 가끔 분출해내는 그의 뻔뻔스러움도 저주한다.
그녀는 오로지 책임감이 결여된 섹스를 원한다.
비가온다. 머리가 아프다. 누워서 잠시 뒤척인다.
나가봐야겠다. 벌떡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간다.
샤워기의 물줄기로 머리카락을 적신다.
샴푸를 펌프질해서 바른다. 그녀는 눈을 감지 않는다.
어둠에 대한 일종의 공포심. 패닉상태에 대한 망상.
눈이 매콤하다. 멈추지 않는다.
거품을 모두 씻어낸다. 모두 씻어낸다. 그녀의 불안함.
까지도.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 멍하다. 집근처 공원에 걸어나간다. 눈이 뻑뻑하다. 인공눈물을 짜넣는다. 주먹을 쥐고 허벅지를 힘껏 때리며 걸어나간다. 어깨가 찌뿌둥하다. 비는 계속해서 내린다. 그녀의 우산이 접힌다. 알루미늄으로 된 우산대가 부러져버린다. 돌돌말린 우산을 손에 쥔다. 비가 투덕투덕 부서진다. 그녀의 흰 티셔츠가 몸에 밀착된다.
멍하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돌돌말린 우산도 사라졌다.
다리가 아프다. 길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녀의 신발이 질퍽거린다. 벗어버린다.
양손에 신발을 끼운채로 걸어간다. 하지만 그것마저 사라진다. 곧.
멍하다.
계속해서 걸어나간다.
스타벅스에 들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계산대에서 그녀는 그녀의 손에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에게 전화를 건다. 빨리와. 아메리카노만 먹을 수 있으면 되.
그녀와 첫섹스를 한 상대 남자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쥐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성격상 물건을 요구할만한 성격은 못되었다. 갖고싶다. 눈치 없던 그 남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망할놈. 그녀는 차라리 몸을 파는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이 섹스를 하는거 라면.
섹스를 즐기지 못하는 그녀가 그에게 주기적으로 몸을 내맡긴다는 것은 상당히 불쾌하다.
그녀는 계산적이다. '좋다'라는 단순한 감정을 가지고 만나기에 너무 파렴치한, 수익성이 전혀 없는 그 남자와는 헤어짐을 택했다.
스타벅스 문을 열고 그가 들어온다. 그녀에게 묻는다. 꼴이 왜그래?
그녀는 그제서야 깨닫는다. 아. 비가 왔었지.
아. 그래. 비가. 왔었지.
그녀가 집으로 옮겨진다. 그는 또 그녀를 애무하겠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감겨진 눈에 키스를 하고 가슴을 움켜쥐고 클리토리스를 살짝살짝 건드린 다음 페니스를 삽입하겠지.
눈을 뜬다. 집으로 들어오려는 그를 밀어낸다. 꺼져.
아. 멍하다. 졸리다.
아침에 일어난다. 몸이 찌뿌둥하다.
간지러운 머릿속을 왼속 두 번째 가락으로 긁어낸다.
찝찝한 기분. 팬티를 내리며 변기에 앉는다. 벌건 핏자국이 엉켜있다.
생리구나. 아. 잊고 있었어.
깨어난다.
그리고.
그녀를 든다. 전화한다. 그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