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성거리는 사람들 덕분에 바닥이 출렁거리는 것만 같다. 미영을 부른 것은 그녀였다. 미영은 탁자 밑으로 고개를 내려 그녀의 구두를 바라본다. 붉게 물든 에나멜 구두가 그녀의 발을 감싸고 있다. 그녀의 발이 계속해서 움직인다. “ 구두 샀나봐?” 고개만 끄덕이고는 다시 전화에 집중한다. 미영이 새 구두를 사기위해 백화점에 그녀를 데려간 날이었다. 가죽으로 된 앵클부츠를 사야할지 붉은 에나멜 구두를 사야할 지 미영은 고민하며 여기저기 그녀를 끌고 다녔다. 검정색 통굽구두가 지친 모습으로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새 구두를 권하는 미영에게 그녀는 “어차피 해질 건데 뭐.”라며 됐다고 했다. 그 뒤로 4년이 지나도록 그녀의 발은 지친 신발에 끌려 다녔다. 그녀가 물을 목구멍에 털어 넣는다. 목구멍에 미처 들어가지 못한 낙오된 물방울은 보이지 않는 곡선을 그리며 그녀의 붉은 에나멜 구두에 자리 잡는다. 미영은 자신의 앞에 놓인 물이 반 쯤 담긴 컵을 들어올린다. 컵을 들어 올린 자리엔 물이 흥건하다. 휴지를 한 장 뽑아내어 닦는다. 유리와 휴지의 마찰음이 요란하다. 원래 이랬던가. 민망해진 미영은 가방을 열고 콤펙트를 찾는다. 가방 속엔 온갖 것들이 뒤섞여있다.
겨우 찾아내서 콤펙트의 뚜껑을 연다. 조각난 파우더 가루가 미영의 치마로 사뿐히 자리 잡는다. 엄지와 검지를 모아 치마를 튕긴다. 겨우 일주일 됐는데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가방을 던진 것도 아닌데 또 깨져버렸다. 깨진 압축파우더들은 미영의 화장대에서 진정한 가루파우더로 거듭난다. 본래의 모습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미영은 가루 낸 파우더를 잘 쓰지 않는다. 가루가 된 파우더는 외롭다. 미영은 메뉴판을 들어 그녀에게 눈짓한다. 그녀는 잠시 후 ‘아무거나’라고 말한다. “여기 아메리카노 두 잔이요.”잠시 후 그녀와 미영 앞을 찻잔 두 개가 가로막는다. 찻잔 두 개 너머 그녀는 더욱 뿌옇다. 그녀 전화기너머 그도 미영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전화기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긴다. 그녀는 전화기와 감정과 욕망을 교류한다. 빨간 매니큐어가 반짝인다. 그녀의 손은 부드럽게 전화기의 안테나를 만지고 액정의 매끄러움을 느낀다.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거기로 그녀는 솟구치고 그녀의 욕망과 감정도 솟구친다. 전화기너머 그는 미영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그녀와 전화기만이 미영의 눈앞에 있다. 그녀와 만난 지 45분이 넘었고 그녀는 여전히 전화기와 섹스를 한다. 미영은 자신의 발을 내려다본다. 까만 미영의 구두는 먼지를 껴안고 있다. 미영은 휴지를 한 장 뽑아서 구두를 닦는다. 그녀의 붉은 에나멜 구두위에는 아직도 물방울이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전화기 속 그가 그녀에게 붉은 에나멜구두를 사준 걸까.
저런 구두를 사줄 정도의 남자라면 보통남자가 아닐 것이다. 패션업계 종사자인가? 그녀는 그에 대해 미영에게 한마디의 설명도 없었다. 그냥 회사에 다닌다고만 했다. 주말엔 바빠서 연락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평일에 오래 통화를 한다고만 말했다. 주말에 바쁘다면 혹시 유부남이 아닐까. 너밖에 없다. 아내하고는 하룻밤 사고 때문에 결혼한 거다. 사실 애정도 없다. 그냥 사는 거다. 이런 말에 저 맹추가 홀랑 넘어가서는 저러고 있는지도 모른다. 28살이 되도록 남자 하나 꼬실 줄 모르던 그녀다. 술자리에서 일어나는 성적인 농담에도 불쾌한 내색한 번 할 줄 모르던 그녀다. 이마에 ‘저는 아무 것도 몰라요.’라고 써놓고 다니는 듯한 그런 그녀였다. 푸석푸석한 곱슬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남자친구와의 첫날밤에 책임져 라며 눈물을 찔금 거릴 것만 같은 여자, 그게 미덕이라고 아는 여자, 그게 바로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저런 구두를 신고 내 앞에 앉아있는 것이다. 다시 보니 스트레이트 파마를 했는지 뭘 했는지 머리가 곱슬기 하나 없이 요란하게 반짝거린다. 저게 요즘 연예인들이 하고 나온다는 메니큐언가보다. 개미도 미끄러질 것만 같다. 미영은 깨진 콤펙트 대신 백화점 사은행사에서 받은 손거울을 꺼낸다. 때 지나 십자가에 걸려있는 마른 성지가지처럼 머리카락은 제멋대로이다. 나도 매니큐어라도 해볼까. 미영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진다. 그녀는 연기학원수업을 듣는 학생마냥 이 표정에서 저 표정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전화기만 호강이다. 원래 맛있는 음식은 늦게 먹을수록 맛있는 법이다. 아내에게 받은 혹독한 개인레슨으로 달궈진 능력을 젊은 여자에게 시험해보고 싶은 심리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법이다. 거기에 홀랑 넘어갔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저 남자, 아내와 못해봤던 온갖 체위를 그녀와 함께 즐기며 너 밖애 없다는 둥 사랑한다는 둥 혼을 쏙 빼놓을 지도 모른다. 그녀가 뭘 알겠나.
그저 그게 사랑인 줄 알겠지. 미영이 아는 척이라도 하려고 들면 넌 사랑을 모른다, 사랑은 아픈 거다, 어쩌다 사랑하게 된 사람이 유부남인 것 뿐 이라며 질질 짜겠지. 처음에는 물론 그녀도 자신의 자리를 인정하며 욕심 부리지 않고 그저 그의 사랑만 받을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며 행복에 겨워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남자 아내의 자리가 탐날 것이고 이혼하라며 그를 부추기게 될 것이다. 그 남자, 이혼 할 생각 있을 리가 없다. 이제까지 일궈놓은 것들을 다 버리고 새로 시작할 만한 가치가 그녀에게 있다고 생각할 리가 없다. 어느 누가 조강지처와 토끼 같은 자식들을 배신했다는 욕을 먹으면서까지 자신의 애인을 지키겠는가. 그저 애인은 애인일 뿐이다. 저 철부지는 정말 뭘 몰라도 정말 모른다. 그렇게 이혼하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 남자는 피곤해질 것이다. 그 전에 잘못해서 임신이라도 해봐라. 이거 곤란해진다. 연애한 번 제대로 못해본 그녀가 피임법이라고 제대로 알 리가 없다. 체외사정이 피임법이라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르겠지. 미영은 그래봤자, 네 업보지 라고 중얼거린다.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온 다음날 밤, 미영은 습관적으로 그의 단축 번호를 눌렀다. 낯익은 음악이 미영의 귀를 감싸 안았다. 잠시 후 그의 목소리가 말했다. 그래봤자, 네 업보야. 구질구질하게 이러지 마. 미영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정말 좋아했지만 이곳엔 올 수 없었다. 이곳에서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는 밖을 지나는 그들을 보았다. 그와 시선을 함께하는 것이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밖을 쳐다보는 것으로 미영은 그의 눈을 쳐다볼 수 있었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지만 어두웠다. 빨간 실로도 빠져나올 수 없는 복잡한 미로가 되어갔다. 그렇게 점점 그와 미영은 차츰 서로를 알지 못하게 되버렸다. 통유리로 된 이곳에서 지나는 사람들을 쳐다보면 공짜로 연극을 구경하는 기분이 든다. 밖이 꽤 어두워졌다. 주말저녁의 압구정은 온갖 사람들로 북적인다. 길거리에 서서 손을 비비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약속장소로 걸어가는 반짝이 스타킹을 신은 사람들, 길거리 리어카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잘 알지 못한다. 미니스커트에 높은 스틸레토 힐을 신은 여자가 애인인 듯 보이는 남자와 싸우기 시작한다. 통유리 안에선 모두 무성연극이다.
여자는 더욱 크게 입을 벌려 침을 튀겨가며 남자에게 퍼붓기 시작하고 남자는 뒤돌아 가려고 하는 그 여자의 팔을 붙잡는다. 하지만 여자는 팔을 뿌리치고 다시 돌아선다. 돌아서는 여자의 긴 생머리가 남자의 목덜미를 스쳐 다시 여자의 어깨 죽지에 착지한다.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는 그녀의 얇고 아찔한 힐이 보도블록 사이에 끼어버렸다. 여자는 다리를 몇 번 움직여보지만 힐은 좀처럼 빠지려 하지 않았다. 남자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여자는 결국 허리를 구부려 손으로 그것을 잡아 뺀다. 남자는 계속해서 웃고 여자는 눈을 흘긴 뒤 재빨리 걸어간다. 남자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여자 뒤를 쫓아간다.사람관계에서의 거리조절만큼 어려운 게 또 있을까. 기대감이라는 것은 외롭다. 아메리카노는 별 맛이 없다. 예전보다도 맛이 없어진 것만 같다. 왜 이런 걸 마시냐는 미영의 말에 인생보단 달거든 이라고 씁쓸하게 말했던 그 남자가 떠올랐다. 미영의 곁에 이제 그 남자는 없다. 그 남자와의 마지막이었던 날, 미영은 욕조에 반쯤 물을 붓고 몸을 담갔다. 몸을 담그면 물에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 남자가 마지막으로 사주었던 아이스크림의 감촉도 섹스할 때마다 느껴지던 겨드랑이의 감촉도 모두 물속으로 휘휘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미영은 네모난 각설탕 하나를 집어 커피잔 안으로 빠트린다. 각설탕이 곧 제 모습을 감춘다. 미영도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만 싶어졌다. 그래서 그에게 자신을 모두 묻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야만 그가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은 가지마라는 미영의 말에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뒤 침을 삼켰다. 전화로 섹스를 나누는 성인전화방의 얼굴모를 사람들처럼 그에 대한 기대감이 커져만 갔다. 미영의 머릿속에 있던 그는 이미 그가 아니었다. 미영은 그가 회사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핑계로 집에 안 들어가길 바랐다.
그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삶은 감자처럼 으깨지기 시작했다. 미영이 그의 회사가 있는 광화문으로 갔던 날이었다. 시청역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그의 회사가 있는 빌딩 앞에 내렸다. 미영은 그에게 전화를 했다. “광화문 근천데 내가 지금 회사 앞으로 갈까?”그가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오늘은 나 속도 안 좋고 그렇네.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미영은 근처약국으로 들어가서 병으로 된 소화제와 알약을 2번 먹을 만큼 샀다. 다시 그의 회사 앞으로 걸어가서 전화기를 꺼낸 순간 회사건물 앞에 서 있는 그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아내가 보였다. 목까지 무언가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미영은 고개를 돌리고 다시 택시를 잡았다. 아무데나 가주세요라는 미영의 말에 택시기사는 말했다. “이봐 아가씨, 현실이야.”
미영이 현실에 돌아오고 나니 그 남자는 없었다. 그녀는 미영과 만난 지 정확히 한 시간 이 십분 만에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커피가 차가워졌다며 종업원을 부른다. “그냥 마셔.”미영이 무표정으로 말했다. “너 왜 그래?”그녀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놀라서 말했다. 미영이 코웃음을 치며 말한다. “몰라서 묻는 거야? 너 그 남자가 언제까지 네 곁에 있을 거 같아? 웃기지마. 너라도 다를 줄 아나본데 다 똑같아. 나중에 손해 본 느낌이라도 안 받으려면 이것저것 많이 뜯어내. 그리고 헤어져. 뭐 남의 남자 갖기가 쉬운 줄 아니? 그거 생각처럼 쉬운 일 아니야. 너 그 남자 아내 본적 있어? 눈 뒤집어져. 세컨드? 말이 좋아 세컨드지, 놀잇감 아냐? 좀 놀다가 해질 대로 해지면 버리는 거야.”그녀의 입과 손과 눈이 웅성거린다. “말 다 했어? 너 말이라고 다 말인 줄 아니? 유부남이라니, 너 남 신세 망치려고 작정했니? 누구보러 유부남이래. 나 결혼해. 너한테 제일먼저 알리려고 만나자고 했더니 뭐? 너 웃긴다. 다 너같은 줄 아니? ”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나 나가버린다. 그녀의 붉은 에나멜 구두가 물결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