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에 대한 거짓말(2005)

조회 수 4131 추천 수 0 2011.06.29 23:41:52
그의 노트북 배경화면에는 복숭아가 놓여있다.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 그에게 있어 복숭아는 가질 수 없어 더욱 욕심이 나는 존재였다. 모르는 이들은 가끔 묻는다.
"어머, 복숭아 좋아하나봐."
그럴 때 마다 그의 사정을 일일이 설명해줄만큼 그는 한가하지 못하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한다.
"응."
'응'이라는 대답은 참으로 명쾌하다. 그는 이 대답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대답하고 나면
그 누구도 더 이상 그에게 복숭아 대해 말 걸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상상도 못했던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유대리, 복숭아 좋아한다며? 우리 조카가 말이야, 유대리처럼 그래, 그 복숭아를 좋아한단말이야.
어때, 한번 만나봐."
어찌 하늘같은 김부장을 거역할 수 있으랴. 이런, 젠장.

복숭아를 좋아한다던 김부장의 조카는 잘 익은 복숭아처럼 양 볼에 분홍색 볼터치를 하고 나왔다.
활짝 웃는 모습이 나쁜사람 같지는 않아보였다.
"복숭아를 좋아하신다면서요?"
"아,네."
더 이상 복숭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대로 말하면 그만일텐데 그의 귀찮음이 이런 자리까지 오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사람들은 공통된 주제를 엮어 상대방을 피곤하게 하려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과 복숭아로 엮이고 싶지는 않았다. 굳이 먹는 걸로 엮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먹는 건 너무나 원초적이다.
"저기, 저 잠깐 화장실에 좀."
김부장의 조카가 정적을 깬다. 여자들은 참 자주도 화장실에 간다. 신체적인 조건에 의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화장을 고치러 간다. 역시 김부장의 조카도 가방을 들고 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녀의 손엔 복숭아 통조림이 들려있다.
"요 앞 편의점에서 사왔어요. 복숭아 좋아하신다길래. 황도? 백도? 어느 걸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그냥 두개 다 사왔지 뭐예요. 호호호."
그가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냥 아무거나 주세요."
"어머, 혹시 통조림 안 좋아하시나보다. 그런 사람들 있더라구요. 생과일만 드시는 분들.
어머, 죄송해요. 하긴 시럽이 좀 달긴 하죠. 전 그런 줄도 모르고..."
갑자기 김부장의 조카가 울기 시작한다.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왜 우는 건가, 내가 복숭아를 안 먹는 게 무슨 죽을 죄라도 되는 건가.
커피숍 안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본다. 정말 한 숨만 나온다. 그녀의 마스카라가 눈물을 타고 내린다. 그녀는 점점 소리 높여 운다. 그는 당황한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커피숍 밖으로 나온다.
" 아, 여자들 우는 건 정말 질색이란 말이지."
한참을 걷다보니 편의점이 보인다. 라면이라도 먹어야지 도무지 배가 고파서 안되겠다.
아참, 월요일 날 김부장 얼굴은 어떻게 보지?

집에 돌아와 제일 먼저 그는 노트북 배경화면을 바꿨다.
이놈의 복숭아. 결국은 복숭아 덕을 톡톡히 보는구나. 막상 바꾸려고 보니 쉽지 않았다.
익숙함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익숙함이라는 것은 시간의 무르익음으로 인해 자연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것의 소중함에 대한 단기기억상실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3년 4개월동안 만났던 A가 떠올랐다. A는 자전거 타기를 좋아했다. 그는 A를 위해 자전거를 장만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A는 누군가의 자전거 뒤에 타는 것을 좋아했다. A는 운동신경이 다른사람들에 비해 덜 발달해있었고 그래서인지 자전거 탈 줄을 몰랐다.
물론 A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유대리는 매일 회사 퇴근과 동시에 A의 집앞으로 달려가 자전거 타는 법 개인교습을 하였다. 그러나 A의 실력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책장에는 자전거 교습에 관한 책이 쌓여갔고 (이 책들은 아직도 그의 책장에 꽂혀있다. 꼴에 올컬러라 책 값이 금 값이었기 때문에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한다.) 인터넷 카페 가입목록에도 자전거 관련 카페 수가 점점 늘어만 갔다. 그는 더 이상 A를 만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자전거라니.
자전거라면 정말 지긋지긋했다. 그리고 그 말을 하기위해 마지막으로 A를 만나러 나갔다.
"너, 너 그게 뭐야?"
A의 눈이 떨리기 시작한다.
" 왜 어때서? 이제 그만 포기해. 포기 할 때도 됐잖아. 나도 이렇게 화장도 하고 치마도 입고 데이트 해보고 싶다고! 이제 그만 할 때도 됐잖아. 매일 땀범벅된 얼굴로 마주봐야겠어? 츄리닝이 옷장을 차지해야 되겠냐고! 그냥 난 너 처음 만났을 때 맞장구 치려고 자전거 좋아한다고 말한거야.
누가 이렇게 3년씩이나 매일같이 자전거랑 셋이 만날 줄 알았겠어?"
대체 그동안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그가 바라본 것은 A가 아니라 A의 자전거 실력이었던 것이다.
A와의 연애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월요일 아침, 김부장이 조용히 유대리를 부른다.
"어땠어? 주말에? 걔가 보기엔 그래도 싹싹하고 야무지고 생각보다 애가 괜찮아. 초등학교 땐 꼬박꼬박 반장도 했다니까. 걔는 괜찮았다던데 괜찮으면 한번 더 만나보지 그래?"
세상에 하느님이 보우하사, 하느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그래, 삼세번이라는 말도 있는데 한번 만나서 어떻게 알겠나.
유대리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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