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여자(2009)

조회 수 3778 추천 수 0 2011.06.29 23:46:22

아침내내 공들여 한 화장이 빗물에 씻겨 다 지워진 것 같았지만 거울조차 꺼내 볼 수 없었다. 오늘 같은 날은 새 구두를 신고 나오는 게 아니었다. 구두 안으로 빗물이 스며들어와 움직일 때마다 질퍽거렸다. 이태리제 양가죽이라 물에 약하다던 구두 점원 말이 떠올랐다. 아니 명품이라면서 물에 약하면 비오는 날엔 어쩌라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사실 그럴만한 위인도 못되었다. 민재는 종종 윤정을 데리고 백화점에 갔다. 신상품을 들춰도 보고 몸에 걸쳐도 보는 민재의 얼굴엔 전에 없던 화색이 돌았다. 어차피 사지도 않을 건데 뭘 그렇게 열심히 보냐는 윤정의 말에 민재는 너는 꼭 사람 기분을 잡치게 하는 데 재주가 있다며 면박을 주기 일쑤였다.

 

이런 걸 봐야 눈이 올라간다며 너는 뭘 모른다는 둥 예전에 사귀던 여자들은 이런 거 한두개는 있었는데 넌 그래서 안된다며 민재가 일장연설을 할 때마다 윤정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 두 사람 중 누구의 월급도 이런 걸 턱턱 살 수 있는 입장은 못된다는 걸 윤정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헤어진지 정확히 삼개월만에 민재로부터 연락이 왔을 때 윤정은 제일먼저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민재가 여자라면 여기 구두는 하나쯤 있어야한다던 매장에 들어가 윤정은 신상품 구두 하나를 골라 신었다. 정성껏 우려낸 사골국물처럼 뽀오얀 가죽구두였다. 내가 이 구두를 신고 나가면 내 발만 보고 있을걸. 어떤 돈많은 놈팽이라도 하나 골라 잡은 건가 속 좀 쓰릴 거다. 민재와 약속한 날은 2주나 남아있었지만 행여나 구두에 흠집이라도 날까 싶어 박스채 옷장 속에 고이고이 넣어 두었다.

하필 이런날 비가 올게 뭐람. 이럴 때 잽싸게 뛰어가서 우산이라도 사다주면 얼마나 좋을까. 문닫은 가게 앞에서 비가 그치길 기다린지 벌써 사십분 째다. 까치발을 딛고 한 쪽 구두를 벗어서 기울이자 물이 고였다. 고인 물을 따라내고 구두를 다시 신었다. 콜택시라도 불러서 타고 가면 얼마나 좋아. 윤정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민재를 쳐다보았다. 민재의 입에서 나온 담배연기가 허공을 타고 돌아 빗물사이로 흘러내린다. 40분째 침묵으로 일관한건 두 사람 다 마찬가지였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입을 열었다면 이렇게 40분이 넘도록 한 자리에 서있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콜택시라도 부르자고 먼저 말하고 싶었으나 왠지 그건 구두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이 정도 구두를 신은 이상 그런 말 쯤은 남자 스스로 하게 만들어야했다. 윤정이 아닌 다른 여자와 있었다면 민재도 이러지 않았을 거다. 벌써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 빗 사이를 헤집고 뛰어나가 기다란 장우산을 사다바쳤을 민재였다. 오빠 고마워. 역시 오빠밖에 없다니까. 콧소리 섞인 여자의 애교에 눈녹듯이 녹을 남자가 바로 민재였다. 하지만 윤정과 있을 때면 왠일인지 그런 민재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민재 스스로도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것저것 사달라고 엉겨붙는 여자를 뿌리치지 못해 매달 카드값에 허덕이던 민재였다. 돌려막기도 모자라 칠순을 훌쩍 넘긴 노모에게 손을 벌리기도 여러번이었다.

 

윤정과 만난 뒤로 카드지출은 줄어갔지만 뭔지 모를 허전함은 더해갔다. 정말 괜찮은 여자라는 중학교 동창의 말에 잔뜩 기대를 가지고 나간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가 바로 윤정이었다. 주변에 괜찮은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있다며 그 쪽으로 가는 게 어떠냐고 묻자 윤정은 비싸게 뭐하러 그런 델 가냐며 떡볶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제가 단골로 가는 떡볶이집이 이 근처예요. 윤정은 민재의 손을 잡아끌었다. 떡볶이 2인분에 순대1인분을 시킨 윤정은 음식이 나오기 무섭게 먹기 시작했다. 배가 많이 고프셨나봐요. 네. 소개팅 나간다는 말에 엄마가 며칠동안 밥을 안주시더라고요. 살이라도 빼야지 이래가지고 어떤 남자가 좋아하겠냐고. 윤정은 멋쩍게 웃었다. 그 날 이후 두 사람은 만나기 시작했다. 입사 5년차인 민재는 흔하디흔한 적금통장 하나 없었다. 적금은 커녕 카드값이나 제 때 막으면 다행이었다. 그런 민재에게 윤정과 같은 여자는 천사와 다름없었다. 보통 여자들이 훅 간다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도 윤정에겐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돈이 그렇게 많냐는 둥 그런 돈 있으면 불우이웃이나 도우라는 둥 화만 불러왔다. 그런 윤정이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론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도 여자 마음은 모르는 거라며 싫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었다간 큰코 다친다며 삼세번은 물어야된다고 친구들이 조언아닌 조언을 해주자 민재는 한번더 생각하게 되었으나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윤정의 생일이 되자 민재는 하루종일 고민했다. 생일인데 그냥 넘어가는 건 조금 그렇잖아. 이런 날을 위해 그동안 비축한거 아니겠어. 민재는 점심시간에 잠깐 백화점에 들러 목걸이를 골랐다. 이게 요즘 잘나가는 디자인이라며 연예인 누가 하고 나와서 전 매장 품절인데 저희 매장에 하나 남은거라고 매장 직원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걸로 주세요. 사무실에 돌아온 민재는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프로포즈 하기 좋은 레스토랑 중 평점이 가장 좋은 곳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완료했다. 선물에 근사한 저녁식사까지 이 정도면 되겠지. 오랜만에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한다고 생각하니 민재의 마음은 들떴다. 이게 뭐야? 눈이 휘둥그레진 윤정이 물었다. 민재는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이거 얼마야? 비싼거지? 뭐 그냥 조금 줬어. 윤정이 잠시 눈을 지긋이 감았다 떴다. 영수증이랑 카드 내놔. 별로 안 비싼거야. 너 정신이 있니? 카드 돌려막기에서 풀려난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걸 사. 누가  이런거 받고 싶대? 네가 돈이 어딨어. 이럴 돈 있으면 불우이웃이나 도와.

 

한달에 십만원 모으기도 쩔쩔매면서 이런건 왜 사니? 비싼 돈 들여 선물사주고 이런 반응 보이는 여자는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윤정을 처음 만날 때 들었던 고마움과 미안함도 이쯤에선 모두 사라졌다. 여자를 만나 선물을 사주고 좋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민재는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살아나는 느낌을 받았었다. 윤정은 민재의 그 알량한 자존심이 꽃을 피우기는 커녕 씨뿌리는 것조차 방해했다. 기분이라도 낼까 싶어 윤정을 데리고 백화점에 간 것도 여러번이었으나 그 때마다 신이 난건 민재뿐이었다. 이런 사소한 차이가 두 사람의 헤어짐을 부추겼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누군가 왜 헤어졌는데?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자꾸 선물을 안받겠다고 하잖아 이렇게 말을 할 수도 생일날도 굳이 집에서 밥을 먹겠다는거야 이렇게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대학 다니며 활동하던 동아리 선배가 결혼을 한다기에 종로에 명동에 나갔던 날 30분 정도 시간이 남아 두 사람은 백화점에 들어갔다. 민재는 평소처럼 윤정의 손을 이끌고 명품 매장에 들어갔다.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민재오빠. 이게 얼마만이야. 여자친구? 3개월쯤 만나고 헤어졌던 여자였다. 여자친구 선물 사주러 왔나보다. 이야 좋으시겠어요.

 

그런거 아니야. 잠깐 구경온거야. 아니긴 오빠 이런데서 선물사주는 거 좋아했잖아. 그 때 오빠가 사준 가방 나 아직도 들고 다니는데? 얘가 쓸데없이 그런 말은 이제와서. 우리 볼일이 있어서 그만 가볼게. 응 그래 오빠 연락 한번해. 밥이나 먹자. 윤정의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민재의 전 여자친구에 대한 질투도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윤정보다 예쁜 얼굴도 아니었다. 그동안 선물을 거절한 건 윤정이었다. 민재가 사주겠다는 것을 한사코 거절하며 민재 주머니 걱정을 한 것도 윤정이었다. 비싼 명품백을 민재로부터 선물받았다는 저 여자가 새삼스레 부러워질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윤정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지기만 했다. 집으로 돌아온 윤정은 자신의 기분이 나빠진 이유에 대해 고민했으나 생각하면 할 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이고 네가 무슨 성녀라고 너는 뭐 별세계에서 왔냐. 남자가 자꾸 선물하려는 거 거절하면 못써. 그 남자 고마워할 것 같지? 처음에야 그래 뭐 고마울 수도 있겠지. 그거 얼마 안가. 괜히 네 몸 값만 떨어져.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윤정을 비웃었다. 몸 값? 몸 값이라니 연애하는데 몸 값이 어딨어. 얘가 모르는 소리하네. 네가 좋은 것도 걸치고 비싸게 굴어야 그 남자도 널 귀하게 여기는 거야. 구질구질하게 아껴봤자 그 남자 그 돈 아껴 딴 데 쓴다. 너 명심해. 생각해보면 윤정은 다른 여자들과 달라지고 싶어 일부러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몰랐다. 윤정이라고 비싼 명품백이 탐나지 않았을리 없었다. 그러나 이제와서 남자친구에게 비싼 선물을 받는 여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윤정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비가 그치기 기다린지 한시간이 넘었지만 그치기는 커녕 비는 점점 거세졌다. 윤정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라디오에서 선전하던 콜택시 번호 씨엠송을 이럴 때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콜택시? 나 돈 없는데. 민재의 말에 윤정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정확히 7분후 콜택시가 도착했다. 나 돈 없다니까. 윤정은 혼자서 씩씩하게 택시에 올랐다. 신사동 가로수길이요. 야. 나는 어떡하라고. 윤정아. 윤정아. 창밖에서 민재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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